이름 짓기
최경하, 수필가, 몽고메리 여성 문학회
“잠깐만요”
“왜요, 할 말 있으세요?” 그 말에는 잠깐 멈춰서 내 이야기를 들어 보실래요? 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고 픈 말이 많은 여인들이 우리 집 원탁에 앉았다.
오랜 이민 생활에도 모국어로 수필을 쓰는 Y, 주제원으로 와서 잠시 머무는 동화작가 J,
손재주 많은 시인 S, 그리고 그림 그리는 나. 우리는 둘러앉아 가벼운 수다는 덜어내고
세상사를 나눴다.
연령대도 다르고 개성도 뚜렷한 네 사람이 함께한 자리는 삶의 별미처럼 귀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은 글쓰기로 이어졌고, 글을 향한 마음들이 모이며 하나
둘 사람이 늘어났다. 어느새 우리는 조금 더 깊어진 글 모임이 되어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어떤 확신이나 기대 없이 시작한 모임은 두 해가 지나면서 그동안 쓴 글들을 모아
책을 만들기로 했다.
우선 책 제목을 만들어야 했다. 저마다의 이름이 지어지면 평생 붙어 다니듯, 끝이
어딘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얼굴이 될 이름을 짓는 일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누었다.
“우리가 매주 수요일에 만나니까 수요일의 창작 어때요?”
“원탁에 둘러앉아 시작했잖아요. 둥근 테이블이나 원탁의 여인들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가 몽고메리에 살고 있으니, 몽고메리에 사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어떨까요?”
마음과 마음, 문고리, 잠깐만요… 저마다의 단어에 의미를 두고 토론을 했다.
우리는 몇 주 시간을 두고 고민을 했다. 왠지 ‘잠깐만요’가 나를 붙잡았다. 아니, 우리를
붙잡았다. 그 이름은 모두의 주위를 맴돌며 분분한 의견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 모임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 나야 하는 것 같아 우리는 ‘잠깐만요’를 선택했다.
어느새 우리는 그 이름으로 세 번째 책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내 글을 누군가에게
보인다는 것이 부끄럽고 조심스러웠지만,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첫 책을 낼 때만 해도 원고를 내밀며 얼굴을 붉히던 K도 이제는 제법
단단한 문장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S의 시는 시간의 흐를수록 더 깊은
울림을 담아내고 있다.
부끄러움 많던 여인들이 어느새 글 앞에서 한 걸음씩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다음 해,
또 그 다음 해를 지나며 이제는 일 년에 한 권씩, 좀 더 익은 모습으로 우리의 네번째,
다섯번째 이야기를 만들어 갈 것이다.
‘잠깐만요’ 그 말의 속내에는 많은 의미가 숨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법 같은
단어로 다가왔다. 빠르기만 한 세상에 잠시 쉬며 숨 고르기 하다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바람결에 답하는 자연, 무심한 시선에 들어온 풀꽃, 행복했던 순간, 젊은
날의 열정, 아이들의 어린 시절, 끝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이는 다시 생각하며 자신을 정리하는 글로, 어떤 이는 잡고 싶은 오늘의 행복한
순간을, 어떤 이는 기억 속의 소중한 보물들을, 어떤 이는 아픈 상처를 꺼내 놓으며
자신을 다지기도 한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별을 앞에 두고 잠깐 더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도 있다. 어느 날, 세월 앞에 무너지는 자신을 보며
흘러가는 시간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글을 쓰기도 한다.
중년을 넘긴 여인들의 이야기는 흔한 일상이기도 하고, 때론 특별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누구나의 삶에는 닮은 모습이 숨어 있다. 그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서로 위로 받고, 지혜를 얻으며, 다시 미소 짓게 된다.
세 번째 ‘잠깐만요’ 책을 만들면서 볼수록 이름 짓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저마다
잠깐 멈춰 자기 삶을 돌아보는 시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까지의 세월은,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흘러가는 마흔, 쉰, 예순의 시간은 돌아보면 그저 빠르기만 했다.
무언가를 이뤄내려고 애쓰던 우리에게 ‘잠깐만요’는 삶이 건넨 다정한 손길이자, 우리
자신을 불러 세우는 따뜻한 속삭임이었다.
그 순간, 삶은 우리를 붙잡고 귓속 말을 건넨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노트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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