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등 걸프 국가들이 호르무즈해협에서 이란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사실상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걸프 국가들 사이에서는 미국이나 이스라엘의 추가 군사행동을 통해 이란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일정 수준의 이란 통제를 인정하더라도 호르무즈해협의 안정적인 통항을 확보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있다.
걸프 국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란의 영향력 확대보다 전쟁이 다시 격화되는 상황이다.
미국이나 이스라엘이 이란을 다시 대규모로 공격할 경우 이란 또는 친이란 무장세력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의 석유시설과 항만, 선박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선제공격한 지난 2월 말 이후 걸프 지역 에너지 및 기반시설을 겨냥한 공격이 172건 이상 발생했다고 전했다.
호르무즈해협의 원유 수송 차질도 걸프 산유국들을 압박하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은 전쟁 이전 전 세계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던 세계적인 에너지 수송로다.
그러나 전쟁 전 하루 약 2,000만 배럴에 달했던 해협의 원유 수송량은 최근 약 220만 배럴까지 감소했다. 사실상 기존 수송량의 10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원유 수출 의존도가 높은 걸프 산유국들의 경제적 피해도 커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그동안 호르무즈해협을 거치지 않는 우회 송유관과 별도 수출항을 확충해 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이들 시설 역시 이란이나 친이란 세력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한계가 드러났다.
결국 걸프 국가들로서는 이란과 일정 수준의 합의를 통해 호르무즈해협의 통항을 정상화하는 방안이 현실적인 선택지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현재 이란은 오만이 중재하는 협상에서 자국이 주도하는 새로운 호르무즈해협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걸프 국가들이 이란의 영향력을 일부 인정하는 방안에는 상당한 위험도 따른다.
호르무즈해협 통제를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 효과를 거뒀다는 인식을 이란에 심어줄 경우 향후 새로운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이란이 해협 통제 카드를 다시 꺼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란 핵 문제와 역내 무장세력 지원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특히 이란은 해협 통항 정상화 조건 가운데 하나로 주변 걸프 국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철수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으로서는 수십 년 동안 유지해 온 걸프 지역 안보 체계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요구여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애틀랜틱카운슬 글로벌에너지센터의 엘런 월드 선임연구원은 5개월간 이어진 전쟁을 겪은 걸프 국가들이 해상 운송 정상화를 서두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면서도 이란에 선박 통제권을 넘길 경우 걸프 국가들의 원유 수출이 앞으로도 이란의 판단에 좌우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걸프 국가들로서는 이란의 영향력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호르무즈해협을 다시 열 것인지, 아니면 장기적인 안보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존 질서를 유지할 것인지를 놓고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