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에 이사한 집이다. 흔히 보던 지붕이 아니라 네모나게 각진, 꽤 모던한
모습의 집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길이 양쪽으로 나뉘었다.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전 주인이 두고 간 하얀 스피츠 두 마리, 해피 부부가 있었는데, 분명 두
마리인데 이름은 하나밖에 기억이 안난다. 왼쪽으로 큰 돌계단을 올라가면 잔디 마당이
펼쳐졌다. 꽤 너른 마당 한쪽 모서리에는 앵두나무가 있었고, 계단 바로 왼편에는
감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봄이면 앵두나무에 환한 꽃이 만발했다. 봄비에 꽃잎이 후두둑 떨어지고 나면
나뭇가지에는 새빨갛고 영롱한 앵두가 맺혔다. 가을이면 주황빛 감이 탐스럽게 매달려
깊은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시골에서 올라오신 친할머니는 마당에 놀고 있는 땅만 보면 한 귀퉁이씩 작물을
심으셨다. 야금야금 잔디를 밀어내고 땅을 일구셨고, 닿는 손길마다 어느새 먹거리가
자라 식탁을 풍성히 해주셨다. 하얀 집에는 그런 할머니가 계셨고, 많은 친척들,
부모님의 지인들, 우리 남매의 친구들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한창 젊었던 엄마와
아빠가 계셨고, 동생과 나도 학창 시절을 모두 보낸 곳이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부모님은 그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오피스텔을 지으셨다.
그리고 가장 윗층에는 우리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하셨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4층에 있는
집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새로 지은 집이 마냥 좋았다. 그
계단에는 수박 한 통을 번쩍 들고 올라가던 엄마의 모습도 있고, 여행을 갈 때마다
커다란 수트케이스를 들고 오르내리던 가족들의 모습도 남아 있다.
집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친구들과 함께 몰려가 신나게 놀던 기억도 있다. 제사나
명절이면 온 친척들이 모였다. 음식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던 엄마는 기분 좋게 음식을
차려내셨고, 우리는 방방마다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참 복작복작하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부모님은 어느덧 여든이 되셨다.
4층까지의 계단이 너무 힘드실 것 같았다. 우리 남매는 살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시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가족회의 끝에 부모님도 동의하셨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신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입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빠의 떨림이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동안의 세월이 담겨 있는
집을 곧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신 듯했다. 자식들의 뜻을 따르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들었던 집을 놓아야한다는 아쉬움이 충분히 느껴졌다.
부모님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계속 강하게 주장했던 나는 아차 싶었다.
새로운 곳으로 이사하고, 새 차로 바꾸고, 새것을 사들이는 일에 익숙한 우리와 달리
부모님 세대는 오래된 것에 깃든 정을 떼어내는 일이 결코 간단하지 않은 것이었다.
40여 년의 세월을 단칼에 끝내는 느낌이라는 것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나의 기준으로 부모님을 몰아붙였다는 생각에 순간 부끄러워졌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터전이었다.
그렇다면 떠나는 데에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계시는 동안 더 많이 느끼시고, 더
많이 아끼시고, 더 많이 누리시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두 분은 많이 고민하신 끝에
이사를 결정하셨다. 그래도 봄까지는 이곳에서 지낼 수 있다며 천천히 새집을
알아보겠다고 하셨다.
그러다 문득 이사를 가려면 이 많은 짐을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하셨다.
“정리하고 새 집으로 이사할 때 우리 딸이 와서 같이 해주면 좋겠다.” 어리광 섞인 그
말에 웃음이 났다.
평생 모아온 짐을 정리하는 날에는 또 실랑이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는
부모님이 살아온 날들을 신중히 생각하려 한다. 물건 하나에도 그들의 시간이 배어 있을
테니, 마음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새 페이지를 열어드리고 싶다.
내년 봄, 앵두나무에 다시 환한 꽃이 피어날 무렵이면 부모님도 새로운 집으로 떠날
채비를 마치실 것이다. 하얀 집에서 보낸 수많은 계절과 웃음소리, 음식 냄새와
가족들의 발걸음은 오래도록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도 또 다른 봄을 맞이하시기를. 새빨간 앵두처럼 작지만 영롱한
기쁨들이 영글어 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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