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경상수지가 한 달새 30억달러(약 4조2000억원)를 넘는 적자를 기록하면서 ‘쌍둥이 적자'(재정수지와 경상수지 모두 적자) 우려가 터져 나왔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라는 복합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경제에 반도체와 중국 경기 둔화, 유가 오름세까지 겹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는 모양새다.
1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경상수지는 30억5000만달러 적자를 기록하면서 넉 달 만에 마이너스 전환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4억9000만달러, 전월보다 38억4000만달러 감소한 수치다.
경상수지 적자는 같은 달 기준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인 2008년 8월 이후 1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통상 경상수지 적자는 4월에 배당금 지급 등의 이유로 적자를 기록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이 밖에는 흑자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경상수지가 4월 외에 적자를 기록한 것은 2012년 2월 이후 10년6개월 만이다.
경상수지는 외국과의 상품·서비스를 사고파는 거래와 해외 투자의 대가인 배당·이자 등 경상거래 결과로 벌어들인 수익을 뜻한다. 쉽게 말해 우리나라가 해외로부터 벌어들인 돈이 마이너스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이런 경상 적자는 한국처럼 국내총생산(GDP) 상당 부분을 수출에 의존하면서 에너지·원자재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에서는 쉽게 외환 수급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해 부가가치를 창출한 이후 타국으로 팔아넘겨야 하는데, 여기에 꼭 필요한 달러화 수급이 쪼들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경제에 대형 위기가 찾아오기 직전에는 매번 경상수지에 빨간불이 켜지곤 했다.
예를 들어 1994년 1월~1997년 10월에는 장기간 경상수지 적자가 쌓이면서 외환위기의 불씨를 제공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8년에는 경상수지가 1~8월 적자 행진을 이어가면서 연간 133억달러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정부는 이번 경상수지 적자의 경우, 과거와 유사한 위기로 연결될 구조적 문제라기 보다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따른 표면적 현상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지난 8월만 해도 국제 에너지·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수입액이 30% 넘게 증가한 반면에 수출이 7.7% 개선에 그친 것이 경상수지 적자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최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무역수지 악화의 ‘제1주범’으로 에너지 수입 증가를 꼽으면서 “단순히 보면 무역적자를 에너지가 다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연간으로는 경상수지 흑자가 전망되는 점도 한국 경제 위기설을 물리치는 근거다. 정부와 한은은 당장 9월부터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변수는 존재한다. 우선 환율 상승이 발목을 잡는다.
미국은 내년 초까지 고강도 통화 긴축을 계속할 것으로 확실시되는데, 이에 글로벌 킹달러(달러 초강세) 현상은 좀체 가시지 않을 전망이다.
결국 1400원대 달러·원 환율은 연말까지 상수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1400원대 환율이 과거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를 제외하고는 우리 경제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환율 상승은 과거와 달리 우리 무역 구조의 변화와 일본 등 경쟁국의 저금리 정책으로 인해 수출 개선에 별반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평가된다. 반면 수입 물가를 올리는 효과는 여전한 탓에 국내 물가와 소비를 악화시키게 된다. 혜택은 적고 부작용은 큰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는 고환율 대응 과정에서 외환보유고를 소진하는데 이것이 경상수지 적자와 함께 맞물려 시장을 불안케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 외환 당국이 환율 방어를 위한 달러화 매도 등에 나서면서 지난달 말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한 달새 196억6000만달러(약 27조8000억달러) 가까이 줄어든 4167억7000만달러로 집계됐다.
물론 우리 정부는 비율로 따졌을 때 줄어든 외환보유고가 매우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며, 과거와 같은 외환위기 가능성은 “매우 매우 낮다”고 시장을 달래고 있다.
다음으로는 글로벌 경기의 추가 악화가 문제다.
대표적으로 최근 중국 경기가 꺾이면서 우리 수출에는 먹구름이 꼈다. 반도체 경기도 마찬가지로 점차 하강하며 삼성전자의 올 3분기 영업이익이 추정치를 훨씬 밑도는 10조원대에 머물렀다. 이른바 ‘어닝쇼크’다.
지난 5일 산유국들의 감산 결정에 오름세로 돌아선 국제유가도 취약한 지점이다. 지금은 에너지 수입액 증가세에 경상수지가 오르내리는 형국인데, 골드만삭스 등 경제 분석 기관들은 연말 국제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 중이다.
유가 상승은 글로벌 불황의 전조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경제 기관들의 분석에 따르면 1980년 이후 10차례 불황 기간 중 적어도 6차례는 국제유가 충격에 영향을 받았다. 오일쇼크와 같은 고유가 충격 또는 오랜 유가 안정기 이후 유가 상승이 글로벌 경기 하강 국면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국제기구들은 내년 세계 경기의 둔화 혹은 침체를 예상하고 있다.
세계적 석학인 모리스 옵스펠드 UC버클리대 교수는 최근 국내 콘퍼런스에서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 노력이 1982년 깊은 경기 침체를 불렀다”며 “미국의 통화 정책에서 비롯되는 파급력은 과거보다 더 심화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수출 중심 경제에 직격탄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26일 중간경제전망에서 “한국이 일본, 호주 등과 함께 유럽, 미국보다 약간 강한 성장 모멘텀을 유지하고 있으나 향후 대외 수요 둔화로 인해 모멘텀이 약화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경기가 식으면 지금은 한국의 물건을 찾는 곳조차 주문을 끊을 수 있다는 경고다.
만일 무역 전선에 빨간불이 지속될 경우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원화 가치는 더욱 저평가될 위험성이 크다. 그러면 한 번의 충격이 자칫 눈덩이처럼 불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전날 정부가 총 18건에 달하는 경상수지 개선 대책을 내년 초까지 내놓겠다고 예고한 이유다. 아직 경제 펀더멘털이 높게 평가되고 성장 동력도 남아 있는 지금,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악재에 대비해 안전판을 덧대겠다는 취지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환율이 오르는 중요한 요인에 무역수지 적자가 있다”라며 “수출을 늘려서 무역수지를 빠르게 흑자로 전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응방안”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