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반도체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네덜란드 ASML의 피터 베닝크(Peter Wennink) CEO(최고경영자)를 만나 장비 공급 확대를 요청했다. 삼성전자의 약점인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사업을 2030년 세계 1위로 올려놓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행보다.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를 유지하고 파운드리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안정적인 EUV 장비 수급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서 필수품인 EUV 노광 장비는 공급이 부족한 상태다. 삼성전자는 화성·평택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EUV 기술을 적용해 파운드리 고객사 제품과 고성능 D램을 생산하고 있다.
◇”EUV 장비 없이 초격차 없다”…ASML 챙긴 이재용 부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14일(현지 시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위치한 ASML 본사에서 피터 베닝크 CEO, 마틴 반 덴 브링크(Martin van den Brink) CTO 등 경영진을 만나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 부회장이 네덜란드 ASML 본사를 찾은 것은 지난 2020년 10월 이후 20개월 만이다. 이번 만남에는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이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양측은 △미래 반도체 기술 트렌드 △반도체 시장 전망 △차세대 반도체 생산을 위한 미세공정 구현에 필수적인 EUV 노광 장비의 원활한 수급 방안 △양사 중장기 사업 방향 등에 대해 폭넓게 협의했다.
특히 차세대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EUV 노광 장비의 원활한 수급이 주요 안건으로 논의됐다. EUV 노광 기술은 극자외선으로 반도체에 회로를 새기는 기술로서, 최첨단 고성능·고용량·저전력 반도체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요소다. ASML은 7나노미터 이하 초미세 공정 구현에 필수적인 EUV 장비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수요 증가로 제조사들이 설비 투자를 확대하면서 ASML의 EUV 장비는 없어서 못 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공급이 부족하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 간 장비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삼성이 ‘반도체 초격차’를 확대하고, 한국이 ‘반도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ASML과의 협력 강화는 필수적인 셈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미세화 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2000년대부터 반도체 제조 공정과 장비 개발 분야에서 ASML과 협력하고 있다. 2012년에는 ASML 지분 투자를 통해 파트너십을 강화하기도 했다.
특히 이 부회장과 ASML 경영진은 한국과 네덜란드에서 수시로 만나 기술 로드맵과 중장기 사업 계획 등을 공유하며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2016년 11월에는 베닝크 CEO 등 ASML 경영진이 삼성전자를 방문했으며, 2020년 10월에는 이 부회장이 ASML의 본사를 찾아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에 사용될 신형 EUV 장비를 살펴봤다.
삼성전자는 화성·평택 반도체 생산라인에서 EUV 기술을 적용해 파운드리 고객사 제품과 고성능 D램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조기 양산이 계획된 파운드리 사업부의 3나노미터(㎚, 10억 분의 1m)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술에도 EUV 노광장비를 도입했다.
업계에서는 반도체 장비 업계의 ‘절대강자’인 ASML과의 파트너십은 제조사들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로서, 이 부회장의 지속적인 관심과 정성이 있었기에 양사가 전략적인 협력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분석했다.
취업제한 족쇄에 경영활동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이 부회장은 삼성의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ASML을 비롯해 주요 고객사와 네트워크를 유지해왔다.
재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이 ASML 장비 확보를 통해 해결사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며 “삼성과 ASML의 파트너십을 공고히 함으로써 이 부회장의 글로벌 네트워크 진가가 발휘됐다”고 평가했다.

◇’메모리 초격차’를 넘어 ‘미래 초격차’ 달성 속도
이 부회장은 15일(현지 시간)에는 벨기에 루벤(Leuven)에 위치한 유럽 최대 규모의 종합반도체 연구소 imec을 방문해 루크 반 덴 호브(Luc Van den hove) CEO와 반도체 분야 최신 기술과 연구개발 방향 등을 논의했다.
또 최첨단 반도체 공정기술 이외에 △인공지능 △생명과학 △미래 에너지 등 imec에서 진행 중인 첨단분야 연구 과제에 대한 소개를 받고 연구개발 현장을 살펴보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이번 imec 방문은 미래 전략사업 분야에서 신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졌다.
삼성은 지난 5월 ‘삼성의 미래 준비 계획’을 발표하고, 반도체 분야를 비롯해 바이오, 신성장 IT(AI 및 차세대 통신) 등 미래 신사업을 중심으로 향후 5년간 45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imec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인공지능 △생명과학/바이오 △미래 에너지까지 다양한 분야의 선행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삼성의 미래 전략 사업분야와도 겹치는 부분이 많다.
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이 ASML과 imec을 연이어 찾은 것은 삼성이 차세대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미래 시장 개척에 적극 나서겠다는 또 하나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했다.

앞서 삼성전자는 ‘메모리 성공 DNA’를 팹리스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 분야에 이식해 진정한 ‘반도체 초격차’를 달성하고자 지난 2019년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더 큰 시장과 성장 가능성을 갖고 있는 팹리스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위기감과 고민이 담긴 비전이다.
팹리스 시스템반도체 산업에는 인텔(CPU)·엔비디아(GPU)·퀄컴(SoC) 등 분야별 거대 기업들이 포진해 있으며, 파운드리는 대만의 TSMC가 공격적인 투자를 바탕으로 시장 지배력을 높여가고 있다.
삼성의 ‘반도체 비전’이 달성된다면 ‘메모리 초격차’를 넘어 반도체 3대 분야를 모두 주도하는 초유의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으며 대한민국에 삼성전자 규모의 기업을 하나 이상 신규 창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상황이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삼성의 미래를 위한 이 부회장의 고심이 깊은 것 같다”며 “이 부회장과 삼성전자가 향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더욱 공격적인 행보를 펼쳐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