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자동차 기업인 폭스바겐이 그동안 자사 전기차에 사용하던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각형 배터리를 사용하겠다고 밝히면서 그동안 파우치형을 공급하던 국내 배터리 업체들의 타격이 예상된다. 다만 업계에선 당장은 악재가 맞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위기가 아니며 오히려 국내 업체들의 시장 주도가 이어질 것이란 목소리가 높다.
지난 15일 폭스바겐은 그동안 사용하던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각형의 통합 배터리셀(Unified cell)을 만들어 2030년까지 자사의 전체 전기차 중 80%에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결정은 그동안 폭스바겐에 파우치형 배터리를 공급하던 LG에너지솔루션·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기업에게 악재가 될 것이란 의견이 많다. 폭스바겐은 지난해 전세계에서 테슬라 다음으로 가장 많은 전기차를 판매한 회사인데, 각형 배터리를 생산하지 않는 LG·SK는 현재 계약된 물량을 소화하고 나면 앞으로 폭스바겐에 대한 수주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있어서다.
여기에 폭스바겐이 장기적으로는 배터리를 내재화하겠다고 밝히면서 증시도 국내 배터리 업체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지난 16일 코스피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의 모기업인 LG화학의 주가는 전날 대비 7.76%, SK이노베이션은 5.69% 하락했다. LG화학 주가가 하루만에 7% 넘게 하락한 건 코로나19 여파로 역대급 폭락을 겪었던 지난해 3월19일(-17.86%) 이후 1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
|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소재 LG화학 본사와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소재 SK이노베이션 본사.© 뉴스1 |
배터리 업계에선 이번 결정이 악재는 맞지만 지나친 우려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장기적으로는 폭스바겐이 대주주인 스웨덴의 노스볼트와 중국의 궈시안 등이 국내 기업의 배터리 물량을 가져가겠지만, 이들은 아직 신생 업체라 배터리 양산 수율이 안정화되지 않은 만큼 배터리 공급의 안정성 면에서 당장 국내 기업 수준에는 못 미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유력한 파트너로 거론되는 중국의 CATL도 아직 품질 면에선 한국 배터리보다 열위라는 평가다.
때문에 폭스바겐이 2030년까지 각형 배터리로 대체한다고 해도 이런 국내 업체들의 강점으로 인해 폭스바겐 수주가 전무할 정도로 급감하진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업계는 현재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이 폭스바겐으로부터 수주한 물량만 유지해도 2030년 폭스바겐 전체 배터리 수요의 15% 이상은 차지할 것으로 본다.
한 업계 관계자는 “폭스바겐 같은 대형 업체들은 리스크 관리를 위해 자사가 필요한 배터리의 40~50%나 되는 큰 물량을 한 업체에만 몰아주지 않는다”며 “다른 업체도 넣어 가격 경쟁을 붙이는 만큼 아무리 많이 가져간다고 해도 한 업체당 25% 수준일 텐데, 이미 국내 업체들은 폭스바겐 물량의 10~15%를 수주했다”고 설명했다.
폭스바겐이 전체 물량의 80%를 각형으로 전환 완료하는 2030년 이후에도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경쟁력을 유지할 것이란 관측도 있다. 이번에 폭스바겐이 각형을 선택한 건 배터리의 원활한 수급과 각형이 주류인 중국 전기차 시장을 공략한다는 전략상 필요에 의한 것이지, 파우치형 배터리의 성능이 떨어져서 버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현대차·GM 등 대형 업체들도 파우치형을 주력으로 사용 중이다. 이들 업체를 비롯해 앞으로 파우치형 시장이 확대될 수 있다.
이는 각형 배터리가 가격 면에서 파우치형보다 우위에 있지만, 파우치형은 규격화된 각형과 달리 자유로운 모양을 통해 전기차의 공간 구조와 디자인 구현에 훨씬 유리하다는 장점이 있어서다. 때문에 앞으로 전기차 시장이 발전해 단순히 가격이 아니라 전기차의 엔터테인먼트가 강조되는 시대가 되면 파우치형 배터리의 쓰임새가 더욱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백영찬 KB증권 연구원은 “장기적인 전기차 모델 변화에는 각형보다 파우치형이 최적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전세계 전기차 업계 1위인 테슬라가 주력으로 원통형 배터리를 쓴다는 점도 중요하다. 테슬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원통형 배터리 시장도 더욱 확대될 것이고, 현재 테슬라에 원통형을 납품하는 LG에너지솔루션의 수주도 늘어날 수 있다. 루시드·프로테라·로즈타운 등 향후 고성장이 예상되는 미국 전기차 스타트업들이 모두 원통형을 채택한 점도 향후 시장 전망을 밝게 하는 이유다.
|
| LG에너지솔루션 파우치형 배터리(LG에너지솔루션 제공). © 뉴스1 |
각형이 아니라도 여전히 폭스바겐에 수주할 수 있는 길도 있다. 폭스바겐은 자사의 80% 전기차에 대해 각형 배터리를 쓰지만, 나머지 20%는 형태를 언급하지 않고 고성능 배터리를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업계는 현재 중국보다 기술 면에서 우위에 있는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주행거리·급속충전·경량화 등 파우치형 배터리의 장점을 살려 이 프리미엄 물량 수주에 집중할 것으로 예상한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폭스바겐이 각형 배터리로 전환해 잃은 기회보다, 전기차 시장이 매년 폭발적으로 확대되면서 늘어나는 배터리 납품 기회가 더 클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번 결정은 폭스바겐이 파우치형으로 계속 갔을 때 국내 업체들이 가져올 수 있었던 기회를 잃어버린 것으로 봐야지, 다른 기회가 없어진 게 아니다”라며 “갑자기 하늘이 무너질 듯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