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겠다고 나서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가 위기감에 술렁이고 있다. 배터리 수급난으로 인해 배터리 업체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이를 되찾기 위한 완성차 업체들의 주도권 싸움이 시작됐다는 분석이다.
지난 15일 폭스바겐은 그동안 사용하던 파우치형 배터리 대신 각형의 통합 배터리셀(Unified cell)을 만들어 2030년까지 자사의 전체 전기차 중 80%에 공급하겠다고 밝히며 ‘내재화’를 선언했다. 지난해 테슬라도 3~4년 내에 배터리를 생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재 전세계 전기차 판매량 기준 1·2위 완성차 업체가 모두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최근에는 현대차도 배터리 연구개발 조직을 강화하는 등 자체 생산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도요타도 2025년 상용화를 목표로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 중이다.
이렇게 완성차 업체들이 줄줄이 배터리 독립에 나서는 건 가격 때문이다. 현재 배터리는 전기차 가격의 40%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를 낮춰야만 내연기관차와의 가격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다른 업체의 전기차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특히 지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배터리를 자체 생산할 경우 배터리 업체들에게 ‘납품 단가를 여기에 맞추라’고 압박할 수 있는 수단도 된다. 배터리 내재화 선언 당시 토머스 슈몰 폭스바겐그룹 컴포넌트 CEO는 “배터리의 비용과 복잡성을 줄이는 게 목표”라며 “이렇게 되면 e-모빌리티가 저렴해지고 드라이브 기술 시장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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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소재 LG화학 본사와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 소재 SK이노베이션 본사.© 뉴스1 |
배터리 업체에 대한 의존도를 지금보다 낮춰야 한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전기차 시장의 폭발적인 확대로 오는 2025년 배터리 수요는 1254GWh로 증가하는 반면, 공급은 1163GWh에 그칠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핵심 부품의 공급이 부족하면서 현재는 납품사가 아닌 고객사가 ‘을’인 특이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폭스바겐은 최근 배터리 업체들 사이의 소송으로 인해 생산 계획에 차질을 빚는 일도 있었다. 폭스바겐은 SK이노베이션의 미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배터리를 공급받기로 했는데, 최근 SK가 영업비밀 침해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2년의 유예기간 이후에는 배터리 수급이 어려워질 상황에 놓였다. 배터리를 자체 생산하면 이런 외부 변수로 인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완성차 업체들이 속속 내재화에 나서면서 배터리 업계의 주도권은 조금씩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전기차의 ‘엔진’을 쥐고 있지만, 완성차 업체의 배터리 내재화가 이뤄지면 단순한 부품사 중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 송선재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당분간은 배터리 산업 진입 장벽과 해자를 뚫기 위한 자동차 업계의 공성전으로 배터리 분야의 높은 평가는 점진적으로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만 아직은 큰 기술 격차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 배터리 업체들의 역할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의견도 있다. 업계는 당장 배터리 내재화를 추진하더라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는데 최소 7년 이상은 걸릴 것으로 예상한다. 실제로 지난 19일 독일 BMW의 올리버 칩세 CEO는 “배터리 업체들이 충분하게 공급해 줄 것이기에 배터리를 자체 생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배터리 업계는 과도한 우려는 경계하면서, 후발 주자인 완성차 업체들과 격차를 벌릴 수 있도록 배터리 기술을 고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는 단순히 싸게 만드는 게 아니라 긴 주행거리를 유지하고 화재 등 안정성을 높이는 것도 관건”이라며 “여기에서 기존 업계가 승부를 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