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년간 이어온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판결에서 법원이 근로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기업의 임금 부담이 한층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번 판결은 통상임금과 관련한 ‘신의성실의 원칙’ 적용 여부가 재판부에 따라 다시 한 번 뒤집힌 사례여서, 보다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16일 정모씨 등 근로자 10여명이 근로자들을 대표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임금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사측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번 판결은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봐야 하며, 이에 더해 근로자의 추가적인 법정수당 청구를 신의칙으로 배척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기업이 일시적 경영상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사용자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경영 예측을 했다면, 그러한 경영상태의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며 “향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신의성실의원칙'(신의칙)을 들어 근로자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를 쉽게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이 근로자들의 손을 들어준 만큼, 현대중공업이 지급해야 할 통상임금 소급분은 수천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통상임금이 커지면 이를 기준으로 산정하는 연장·야간·휴일 등 각종 수당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상여금은 2개월마다 100%씩 총 600%, 연말에 100%, 설추석 명절 50% 등 총 800%였다. 이 800%의 상여금을 회사는 종업원과 퇴직자에게 하루 단위로 계산해 지급했지만, 명절상여금은 재직자에게만 지급했다.
1심 재판부는 2105년1월 판결에서 현대중공업 사측이 근로자 3만8000여명에게 4년6개월치 소급분 약 6300억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한 바 있다. 여기에 지연이자 등을 가산하면 사측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비용은 1조원에 가까워질 수 있다.
산업계는 코로나19와 원자재 상승 등으로 가뜩이나 경영환경이 어려운 상황에서 내려진 이번 통상임금 판결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들의 임금 부담이 크게 증가하면 경영의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현대중공업과 같이 초과근무가 잦은 현장 근로자가 인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조선, 자동차 등과 같은 제조업체가 큰 영향을 받는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들어 3분기까지 매출 5조8354억원, 영업적자 3195억원을 기록하고 있는만큼, 이번 판결에 따라 부담해야 할 수천억원의 소급분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추경호 경제정책실장은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경기회복 지연, 대내외 경영환경 악화 등 국가 경쟁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은 이번 판결로 예측치 못한 인건비 부담이 급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의칙’에 대한 법원의 들쑥날쑥한 판결도 소모적인 논쟁과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이라는 불만도 나온다. 같은 건이라도 심급에 따라 신의칙이 인정됐다가 부정되기도 하고, 건별로도 판단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의칙이 적용되면 통상임금에 상여금이 포함되더라도 회사는 과거 임금까지 소급해 지급할 필요가 없어져 부담을 한층 덜 수 있는데, 재판부에 따라 소급 지급에 따른 사측의 경영재무상 타격 정도를 달리 판단하고 있어 판결이 자주 뒤집힌다.
이번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을 보더라도 울산지법은 1심에서 신의칙을 부정했지만, 부산고법은 신의칙을 적용해 사측의 손을 들어줬고, 이번 대법 판결에서는 다시 고법 판결을 뒤집었다.
기아차의 경우 1심 재판에서는 사측이 패했지만, 2심에서는 노조가 승리했고, 대법은 원심을 그대로 확정했다. 2020년 8월 대법원은 직원들이 받은 정기 상여금이 정기적, 일률적, 고정적으로 지급되는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원심의 판결을 그대로 유지했고, 노조의 추가 수당 요구가 회사의 경영에 어려움을 초래, 신의칙에 위반한다는 회사 측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했다. 이에 따라 기아차는 재산정한 임금 6588억원에 지연이자 포함, 약 1조원을 지급했다.

이처럼 신의칙과 관련한 판결이 자주 뒤집히는 것은 뚜렷한 법 규정이 없는 데 기인한다. 대법원은 2013년 갑을오토텍 통상임금 소송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그러면서 정기 상여금의 비중이 커 통상임금 추가 지급에 따른 실질적인 임금 인상률이 높다고 판단될 경우 신의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판시해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만, 내용이 세부적이지 않다.
이날 현대중공업이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지만, 당사의 입장과 차이가 있어 판결문을 받으면 면밀히 검토해 파기환송심에서 충분히 소명할 예정”이라고 밝힌 것도 신의칙과 관련한 법원의 판단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대법원은 해외의 경제상황 변화와 이에 따른 영향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나, 대법원의 주장과 달리 오늘날 산업은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며 “코로나19 등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위기와 변화가 수시로 발생한다”고 밝힌 것도 신의칙에 대한 판단을 뒤집은 데 대한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영계는 신의칙 적용과 관련한 구체적인 지침을 정부 등이 마련해 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추경호 실장은 “통상임금 소송이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임금협상 과정에서 노사 간 형성된 신뢰를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부가적으로 경영지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경영상의 어려움을 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통상임금 논란의 본질이 입법 미비에 있는 만큼 조속히 신의칙 적용 관련 구체적인 지침을 마련해주기를 바란다”고 촉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