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유족들이 발표한 고인의 기증 물품에는 국보 14건, 보물 46건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60건이나 포함돼 눈길을 끈다.
삼성에 따르면 홍라희 여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 등 유족들은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고인의 뜻을 기리는 게 진정한 의미의 상속이라는 데 뜻을 함께하고 미술품 기증을 결정했다.
이번에 기증한 고미술품 2만1600여점, 국내외 작가들의 미술품 1천600여점 등 총 2만3000여점의 미술품을 두고 언론에서는 감정가를 수조원대로 추산했지만, 문화계에서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컬렉션’이라는 말이 나온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국보 제216호로 진경산수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영조 27년인 1751년, 당시 75세인 정선이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을 그린 것으로, 국보 제217호인 ‘금강전도’와 함께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순간과 그 느낌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단원 김홍도의 ‘추성부도’는 순조 5년인 1805년에 그린 시의도(詩意圖)로 보물 제1339호로 지정돼 있다. 조선 후기 대표적 화가인 김홍도가 중국 송대 구양수(歐陽修, 1007∼1072년)가 지은 추성부(秋聲賦)를 그린 작품이다. 가을밤의 스산한 분위기를 잘 드러낸 수작으로, 인생 말년에 접어든 작가가 느끼는 공허함이 투영된 작품으로도 평가받는다.
|
‘추성부도’, 단원 김홍도 作, 1805년© 뉴스1 |
‘천수관음 보살도’는 국내 유일의 고려 천수관음 불화로 보물 제2015호로 지정돼 있다. 천개의 손과 손마다 눈이 달린 보살의 모습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의 자비력을 상징화한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근대 대표작가 작품 1488점 중에서는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등이 대중과 친숙한 작품들로 꼽힌다. 또 국립현대미술관이 해외 유명 미술관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품격과 위상을 갖출 수 있도록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과 호안 미로의 ‘구성’, 살바도르 달리의 ‘켄타우로스 가족’ 및 샤갈, 피카소, 르누아르, 고갱, 피사로 등의 작품도 이번에 기증 작품에 포함됐다.
아울러 유족들은 제주 이중섭미술관, 강원박수근 미술관,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지방 미술관 5곳과 서울대 등에도 유명 작품 143점을 기증하기로 했다.
지정문화재 및 예술성 및 사료적 가치가 높은 중요 미술품의 대규모 국가 기증은 사실상 국내에서는 이번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 사례가 최초다. 이는 해외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대규모 기증 사례다. 이 회장은 생전에 발간한 에세이에서 국립박물관을 관람한 경험을 전하며 “상당한 양의 빛나는 우리 문화재가 아직도 국내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것들을 어떻게든 모아서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그간 그의 고미술품 수집에는 이 같은 기증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이건희 회장은 세계 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주요작가의 대표작이 한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문화 발굴과 후원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93년 6월 내부 회의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재다, 골동품이다 하는 것은 한데 모아야 가치가 있는 것”이라며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등을 언급한 바 있다. 이번에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을 대거 기증하면서 그동안 핵심 작가들의 작품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온 국립현대미술의 컬렉션과 위상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고인은 2004년 리움 개관식에서도 “비록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갈지라도 이는 인류문화의 미래를 위한 것으로, 우리 모두의 시대적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문화유산 수집·보존을 공익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내비친 바 있다. 과거 일본 오쿠라호텔 뒷마당에 있던 조선왕조 왕세자의 공부방인 자선당의 기단을 구입해 정부에 기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
국보 제134호, 금동보살삼존상, 백제시대© 뉴스1 |
이건희 회장은 문화 융성에 대한 사명감으로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지원도 꾸준히 이어갔다.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프랑스 기메박물관에 한국관 설치를 지원한 것도 우리 문화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삼성은 전했다.
그는 재능있는 예술 인재를 선발해 해외 연수를 지원하고, 백남준, 이우환, 백건우 등 한국 예술인들의 해외 활동을 후원하기도 했다.
삼성 측은 “이건희 회장은 문화예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했다”며 “1997년 5월 용인 호암미술관에 한국식 정원의 멋을 살린 전통정원 ‘희원'(熙園)을 개원했는데, 원래는 서양식 야외 조각 전시장 자리였으나 한국 정원을 보존, 전승해야 한다는 이건희 회장의 기획에 따라 조성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