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도 예산이 국회 심사 과정에서 정부안보다 많게는 수조원대 불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증액 규모에 따라서는 임기 내 재정지출 증가율을 4%대로 묶겠다는 윤석열 정부의 ‘다이어트’ 구상이 시작부터 차질을 빚을 수 있다.
9일 정치권에 따르면 국회 여야는 예산 심사 방향으로 하나같이 ‘민생 예산 증액’을 강조하고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4일 예산안 심사 방향을 발표하면서 대통령실 이전 비용 등을 삭감하고 감세 규모를 줄여 민생 예산 5조~6조원을 증액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지난달 말 발생한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안전 예산 등의 추가 증액 여지도 남겼다.
국민의힘은 전날 주요 증액 사업을 20개, 총 증액 규모를 약 2조원으로 설정한 예산안 심사 방향을 공개했다.
여야가 밝힌 증액 규모와 증·감액 대상으로 삼은 사업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민생 예산을 확대하겠다’는 방향성 만큼은 같다.
민주당이 증액을 예고한 사업에는 △119 구급대 지원 △지역화폐 △어르신 일자리 △기초연금 단계적 인상 △저소득층 영구 임대주택 △청년내일채움공제 △쌀값 안정 △취약차주 금융지원 등이 포함됐다.
국민의힘의 경우 △장바구니 소득공제 100만원 지원 △지하철-시내버스 통합 정기권 신설 △안심전환대출 확대 △한계 소상공인 이자 지원 △영유아 보육료 인상 등을 주요 증액 사업으로 꼽았다.

여야의 증액 요구 배경에는 최근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현상으로 인한 민생고와 이듬해부터 본격화될 경기 침체 우려가 있다는 평가다.
3고 현상으로 빨라진 민생 경제 악화 속도를 늦추려면 재정의 역할이 불가피한 데다 내년 뒤늦게 추가경정예산(추경)을 짜기 보다는 본예산을 통해 미리 침체에 대비할 필요도 있다는 취지다.
과반 의석을 거머쥔 야당의 공세에 여당마저 일부 예산 사업의 확대를 요구할 경우 내년 본예산 규모는 정부가 당초 계획한 639조원에서 늘어날 수 있다.
국회는 각 사업 예산을 삭감할 순 있지만 정부 동의 없이 예산을 늘리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는 없다. 즉 여야의 증액 방침은 모두 정부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문제는 정부가 여야의 증액 방침을 무한정 거스르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예산 통과 기한인 다음 달 2일까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국회 전체 300석 중 169석을 차지한 민주당의 협조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내년 예산의 법정 기한 준수는 시장의 대정부 신뢰를 높이는 것은 물론 최근 높아진 경제적 불확실성을 낮추는 효과도 기대된다.
정치권이 원하는 대로 예산을 늘리려면 정부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한 쪽에서는 정부도 똑같이 당의 협조를 필요로 한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예산 당국인 기획재정부는 민주당의 요구에 일부 응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지난 7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노인 일자리 예산 확대 요구에 대해 “공공형 일자리를 늘리는 부분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단, 윤석열 정부가 임기 내 야심차게 밝힌 재정 다이어트 계획이 정치권 증액 요구에 밀려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은 걸림돌이다.
앞서 정부는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2026년까지 국가 재정 지출(총지출) 증가율을 연 평균 4.6% 수준으로 관리하겠다고 밝혔다. 내년 총지출 증가율은 5.2%로 설정했지만 내후년부터는 4.8%, 4.4%, 4.2% 등으로 차츰 축소할 계획이다.
올해 본예산(607조7000억원)을 고려하면 국회 심사 과정에서 예산이 1조원 늘 때마다 내년 총지출 증가율은 약 0.16%포인트씩 오른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여야가 어떤 사업을 감액하고 어느 수준의 증액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현 5.2%로 설정된 내년 총지출 증가율이 5%대 중후반에 이를 수도 있는 상황이다.
다만 여야의 증액 규모가 수십조원에 이르진 않는 터라 올해 추경을 포함한 지출(679조원)보다 내년 본예산 규모를 더 적게 한 ’13년 만의 긴축 재정’은 현재로선 유지될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