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것과 관련해 의사단체는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자제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사필귀정’이라면서 정부여당에 대한 강경한 대응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는 만큼 자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1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사단체들은 총선 결과와 관련한 공식적인 논평을 하지 않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의협) 비상대책위원회는 총선 결과와 관련해 내부 의견을 수렴 중이다. 의협 비대위는 12일 오후 3시 브리핑을 열고 총선 결과와 관련한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전국의대교수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 등은 총선 결과와 관련한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열리는 총회에서 입장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 당선인도 “마음이 참 복잡합니다”라는 게시글을 올렸을 뿐, 별다른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정부의 의대증원 정책에 대해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던 의료계 인사들은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총선과 관련한 논평을 내놓았다.
서울의대 교수 비대위 1기 위원장을 지낸 정진행 분당서울대병원 교수는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개인 기본권을 침해한 것을 용서하지 않는 국민, 민심의 심판”이라며 “윤 대통령은 정권심판을 엄중히 받아들이고 졸속 추진, 거짓 의정협을 즉각 파기하라”고 썼다.
노환규 전 의협 회장은 “이 결과는 2월 대통령이 필수의료 정책패키지를 발표한 순간 예상했던 결과”라며 “자유의 가치를 외면한 보수 여당이 스스로 졌다”고 적었다.
그는 또 “의사들은 여당이 괴롭혀서 단체로 우울하더니, 괴롭히던 여당이 대패하니 단체로 우울해졌다”며 “이런 처지를 생각하니 또 우울해졌다”고 글을 올렸다.
주수호 전 의협 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도 “14만 의사와 2만 의대생 및 가족들을 분노하게 한 결과가 이번 총선 결과”라며 “빈대도 잡고 허물어지던 초가삼간도 태우고 허허벌판에 기초부터 튼튼한 새집을 짓는다는 각오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대전성모병원을 사직한 전공의 류옥하다씨도 “의대증원 과정에서 보여준 윤 정부와 여당의 행태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보수의 근간을 무너뜨린 일”이라며 “견고한 여당 지지층이던 14만 활동의사와 전공의 및 의대생들, 그 가족들이 돌아섰으며, 지식인들과 전문직들, 환자들 또한 보수를 외면한 것이 지금 선거의 결과”라고 비판했다.
일선 의료 현장에서는 강경한 대응은 자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을 사직한 전공의는 “의사 출신 야당 당선인 중에서도 의료계에 비판적인 인사들이 있기 때문에 총선 결과에 따라서 (의대 증원 정책 등이) 바뀌는 것은 없을 것”이라며 “너무 강경한 대응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의료계가 결집해서 하루라도 빨리 협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내과 교수는 “총선 결과를 보고도 정부에서 의료시스템을 정상화하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아서 큰일”이라며 “지금이라도 의료계와 객관적인 지표를 보고 의대증원에 대해 논의하고, 의료공백을 채우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복지부는 11일로 예정된 의사 집단행동 중앙사고수습본부 브리핑을 돌연 취소했다. 이날 브리핑은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실시할 예정이었다. 복지부는 예정된 브리핑을 보도참고자료 배포로 대체했다.
이번 총선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의대증원을 둘러싼 의정 간 셈법은 더 복잡해진 양상이다. 야당에 압도적 승리를 안겨 준 민심에 정부가 호응하려면 ‘2000명 증원’을 밀어붙이기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그렇다고 물러섰다가는 윤석열 정부의 레임덕을 자인하는 셈이어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반면 ‘2000명 백지화’를 요구하는 의료계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다만 정부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사분오열하는 의료계를 수습해 통일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통 창구의 단일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