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로 보리 200ℓ와 맥아 300ℓ를, 2차로 곡식 251ℓ와 맥아 105ℓ를 맥주 양조업자인 쿠심에게 줬다.’
‘가장인 나디누는 아내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양자로 들이겠다는 아들 벨-카찌르의 요청을 거절한다. 나디누는 오직 벨-카찌르 생물학적 자녀만이 유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각각 가로 6.85㎝·세로 4.5㎝, 가로 11.6㎝·세로 7.0㎝의 크기의 점토판에 담긴 내용이다. 누가 성인 손바닥도 채 안 되는 크기의 점토판에 거래 장부를 남기고, 재산 승계와 상속에 대해 기록했을까.
이는 기원전 3000년대부터 기원전 500년대에 걸친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의 유산이다. 이런 눈부신 문명을 조명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상설전시관 3층에 신설한 메소포타미아실에서 22일부터 2024년 1월28일까지 1년 6개월간 ‘메소포타미아, 저 기록의 땅’ 전시를 선보인다고 21일 밝혔다.
국내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화유산을 다룬 상설전시가 열리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쐐기문자 점토판과 인장, 종교, 초상 미술 등 메소포타미아 유물 총 66점이 공개된다. 이를 통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뛰어난 기술과 그들이 남긴 생각을 돌아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는 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에 놓인 땅’이라는 의미다. 이들은 지금의 튀르키예(터키)와 시리아, 이라크에 걸쳐 흐르는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특히 인류 최초로 문자를 사용, 당시의 철학과 과학을 후대에 전하는 등 현대 사회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집트 문명과 같은 다른 고대 문명에 비해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
양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전 인류가 문자를 쓰지 않던 시절, 문자를 가졌다는 것은 아무도 휴대전화를 쓰지 않던 시절, 혼자 스마트폰을 사용한 것과 같다”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가치를 언급했다.
전시는 크게 ‘문화 혁신’, ‘예술과 정체성’, ‘제국의 시대’ 등 3부로 구성됐다. 1부에서는 쐐기문자가 담긴 점토판 문서 13점과 인장 11점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최초 문자인 쐐기문자를 활용해 점토판에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처음에는 주로 경제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맥아와 보릿가루 수령 내역을 적은 장부’나 ‘축제 때 바칠 동물의 수를 적은 장부’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학습 용도의 5단 곱셈표나 거래 장부, 처방전, 판결문은 물론 재산 승계와 상속에 대한 이야기도 기록했다.
신-바빌리(신-바빌로니아) 제국(기원전 약 626~539년) 때인 기원전 547년경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 점토판에는 오늘날에도 있을 법한 이야기가 담겼다.
아내가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를 양자로 삼아 유산을 받게 끔 해달라는 아들의 요청에, 거부 의사를 밝힌 아버지는 관련 내용을 점토판에 새겼다.
빚을 다 갚았고, 이를 증명한다는 내용의 인장도 볼 수 있다.
2부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인물상을 만들 때 개별 인물의 개성적 특징을 본뜬 것이 아니라 지위와 업적에 걸맞은 이상적인 속성을 조합했다. 이 때문에 생김새가 매우 유사하다. 외향만 봐서는 구별이 어렵기에 이들은 작품마다 별도의 글을 넣었다.
전시품 중 도시 라가쉬를 통치했던 ‘구데아'(기원전 2150∼2125년 재위)의 조각상이 눈에 띄는데 오른쪽 어깨를 노출한 이 조각상은 오른팔 근육을 더 돋보이게 표현했다. 양희정 학예연구사는 “이는 왕이 될 자격을 갖췄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3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대표하는 두 제국인 신-앗슈르(신-아시리아) 제국(기원전 약 911~612년), 신-바빌리 제국의 대표적인 예술을 다룬다.
신-앗슈르 제국은 궁전 내부를 장식한 아름다운 석판 부조로 이름이 높았다. ‘조공 행렬에 선 외국인 마부’는 당시의 정세를 정교한 조각 기술로 담은 작품이다.
‘강을 건너라고 지시하는 앗슈르 군인’에서는 절도 있는 군인과 달리 끌려가는 여성 포로와 널브러진 시신들을 볼 수 있다. 이는 언제나 아군이 이길 것이라는 염원이 담긴 것이다. 이를 통해 상(像)이 현실을 대리하는 힘을 가진다는 앗슈르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신-바빌리를 대표하는 벽돌 건축물인 ‘이쉬타르’ 문과 그 행렬 길을 장식한 ‘사자 벽돌 패널’ 2점도 관람객과 만난다.
전시는 한국고대근동학회와 협력해 메소포타미아에서 보편적인 공용어로 쓰인 ‘악카드어’ 원어의 발음에 가깝게 각종 지명과 인명을 표기했다.
전시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실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세계관과 예술적 성취를 테마로 한 4m 높이의 미디엄큐브가 설치됐다.
전시 관람은 무료다. 국립중앙박물관 측은 “수천년이란 시간 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의 삶과 놀랄만큼 닮아 있는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