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절이면 차례를 지내는 것을 두고 간혹 가족 간 갈등이 쌓일 때가 있다. 올해는 치솟은 물가에 차례 음식을 장만하는 것부터가 당장 부담이다. 조상 몇 대(代)까지 차례를 지내야 하는지를 놓고서도 이견이 생길 때가 있다. 오늘날 제례 문화는 어떻게 정착하게 됐을까.
9일 성균관유도회총본부에 따르면 제를 지내는 문화는 우리 민족의 세시풍속 중 하나였다. 제사는 하늘과 땅, 산천에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자연신과 조상의 가호를 통해 재앙이 없는 생활을 기원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자연신이 아닌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으며, 유교적 형태의 제사 의식은 고려 말 신흥사대부의 등장과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 초기 도입됐다.
당시 제사는 왕가나 사대부 집안이 주로 지냈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회 전반으로 전파됐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제사는 딸, 아들 구별 없이 지냈고 경비도 분담했다. 조상을 받드는 정신은 딸·아들이 다를 수 없고 맏이나 그 외 자녀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제례를 통해 보여준 것이라는 게 성균관 측의 설명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 중국에서 들어온 ‘주자가례’가 자리 잡고 가부장적 유교문화가 확산하면서 제례는 부계친족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제사를 주관한다는 명분으로 재산은 장자 중심으로 상속됐고, ‘남존여비’ ‘재가금지’ 등의 조치들도 시행됐다.
성균관 측은 “한국의 전통문화는 아들, 딸, 친가, 외가를 차별하지 않는 평등의 가족문화로서 특히 여자를 존중하는 문화를 지켜왔고 이런 전통은 조선 초기까지 이어져 왔다”면서도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확산한 주자가례로 인해 점차 부계, 장자, 아들 중심의 문화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조상 몇 대까지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를 놓고서도 변화가 있었다. 성균관 측에 따르면 15세기 말 성종 2년에 완성된 기본법전 ‘경국대전’에는 벼슬 품에 따른 제례규정이 있었다.
3품 이상은 고조부모(高祖父母)까지 4대를 제사 지내고, 6품관 이상은 증조부모(曾祖父母)까지 3대, 7품관 이하 선비들은 조부모(祖父母)까지, 서민(庶民)들은 부모만 제사를 지내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효도에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느냐는 분위기가 일면서 누구든지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는 전통이 이어졌다.
이후 1969년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내라고 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제사를 ‘우상숭배’라 여기는 외래 종교의 가치관과 충돌하는 일도 발생하고 있다.
최영갑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은 “나를 낳아준 조상을 추모하며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고 은혜에 답하는 명절이 되길 바란다”며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 것보다 간소하게라도 지내는 게 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