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무 해를 한 인간의 성년이라고 할 때 예순을 넘긴 나는 네 번째 성년에 들어섰다. 20~40세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시기였고, 40~60세는 나의 업을 원숙의 경지에 이르게 한 시기였다. 60세부터 80세까지에 해당하는 네 번째 성년에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나름대로의 경륜과 지혜를 후배와 제자들에게 환원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것이 목표다.”
‘환갑을 넘겼음에도 청년처럼 열정이 넘친다’라는 말에 탤런트 박상원(63)은 “나는 환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20년 주기로 새로운 성년을 시작한다. 지금 네 번째 성년을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박상원의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그는 데뷔 45년 여정에 대해 간략하지만 강렬하게 풀어냈다.
모교인 서울예대의 교수로서 강의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그는 최근에는 3학년 수업을 맡았지만 이전까지는 신입생(1학년) 수업을 자처해서 맡았다. 배움의 첫 단추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 연기생활의 시작은 아무것도 모르던 예술미개인·문명인·원시인 상태였다. 그런 상태로 명동 남산 드라마센터 올라가 신입생이 됐고 불과 2~3개월 만에 이 세상 최고의 예술가를 흉내 내는 사람으로 변했다. 예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막연하게 시간과 공간과 무게, 연기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고민했다. 작동원리도 모르면서 연극적 상상, 창조적 망상에 사로잡혔고, 엄청난 무게의 단어들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자랑하고 티내고 활보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거만하게 굴고, 거만함 자체도 배웠다”고 회상했다.
신입생이었던 자신의 스무살을 회상하는 박상원의 얼굴엔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그는 1학년 1학기 때 극작가 차범석 선생의 ‘불모지’라는 작품을 만나 주인공을 하겠다면서 도전했다. 덜컥 주인공으로 발탁돼 공연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다음 작품, 그 다음 작품도 주인공을 연거푸 맡았다.
박상원은 “첫 단추를 잘 꿰었다. 1막도 내 엔딩대사, 2막도 내 엔딩대사였다. 경험도 없는 내가 연기인생 첫 작품을 차범석 선생의 불모지 ‘최노인’ 역할을 맡았다. 대사의 절반이 내 역할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실현된 것이다. 그 무게감과 두려움 때문에 1978년 4~6월 삼 개월 간 죽을 만큼 연습했다. 그렇게 연습했고, 해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사회 모든 청년 후배들이 자신의 세대보다 훨씬 뛰어난 기량을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아쉽게도 도전정신, 열정, 겸손이 부족한 점은 아쉽다고 지적했다. 그가 고등학생들을 위한 특강이나 신입생들 상대 강의를 즐겨하는 까닭은 그들의 젊은 그 순간이 너무나 중요해서다. 젊은이들을 위한 강의에 나설 때마다 ‘귀가 뻥 뚫리도록 가슴이 열리도록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얘기를 해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끝없이 도전해야 한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함이 필요하다. 자신을 너무 높은 지점에 두고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작은 난관에도 쉽게 실망하고 좌절할 위험이 있다”고 조언했다.
이어 “하루도 길다면 긴 시간이다. 8만6400번의 똑딱임(초)으로 이뤄졌다. 매순간을 열정적으로 소중히 보내야 한다. 지나오면서 생각하니 1년은 꽤 길지만, 10년은 꽤 짧다. 바꿔 말해 10년은 짧고 1년은 길다. 나는 매순간을 무한대로 살기 위해 까탈스럽게, 꼼꼼하게, 디테일하게, 히스테릭하게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박상원은 배우 활동 외에도 사진작가, 월드비전과 함께 아프리카 봉사활동, 국립암센터 후원회장,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서울예대 교수, 서울예대 총동문회장직을 맡아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보낸다.
올해는 모노드라마 ‘콘트라바쓰’ 국내 공연에 집중해왔고, 내년에는 미주와 유럽 투어공연을 준비 중이다. 또한 내년 4월 미국에서 사진전시회도 연다. 서울예대 총동문회장으로서는 내년 창학 60주년 ‘불꽃축제’를 기획하고 있다. 경기도민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성한 행사를 만들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