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놓은 덫에 보기 좋게 걸리며 첫 TV토론에서 사실상 패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10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은 이날 미국 동부시간 기준 밤 9시(한국 시간 11일 오전 10시)부터 90분간 ABC뉴스 주최 토론에 임했다.
양측은 경제, 불법이민, 낙태, 전쟁 등 주요 정책 이슈를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토론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두 후보 모두 침착하게 답변을 이어갔으나, 먼저 궁지에 몰린 건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는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토론 때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태도로 시작했지만, 해리스가 그를 조롱하면서 점점 더 좌절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평가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발언하는 동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이후 자신의 발언 차례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향해 ‘지루하다’는 쓴소리도 이어갔다.
이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며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또 해리스 부통령이 고개만 흔들었는데도 “지금 내가 말하고 있다”며 예민하게 굴기도 했다.
이를 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측근 중 일부는 CNN에 “오늘 밤 그가 토론에서 여러 번 평정심을 잃은 것에 대해 좌절감을 느낀다”고 평가했다.
평정심을 잃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경제와 이민 문제 등 자신에게 유리한 주제에서도 해리스 부통령을 공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해리스 부통령은 사회자들이 이민에 대한 주제를 던지자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과거 발언을 꺼내 들며 그는 늘 가짜 주장으로 점철된 같은 말만 내뱉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가 집회에서 한니발 렉터와 같은 허구의 인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볼 것”이라며 “또 풍차가 암을 유발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물의를 빚었던 과거 발언들을 언급한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7월 유세에서 “영화 ‘양들의 침묵’은 실제 이야기”라며 “한니발 렉터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와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라고 언급했다.
불법 이민 범죄자를 영화 속의 식인종 범죄자인 한니발 렉터에 비유하려던 것으로 보이지만, 뜬금없는 발언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 2020년 풍차가 암을 유발한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당신 집 근처에 풍차가 있다면 축하한다. 집값이 75% 떨어졌다. 또 발전기가 돌아가며 내는 소음은 암을 유발한다”고 말했다.
해리스 부통령은 “여러분들은 사람들이 피곤함과 지루함으로 인해 그의 집회를 일찍 떠나기 시작한다는 점을 눈치챌 것”이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런 허황된 발언들만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고문들은 해리스 부통령이 토론 과정에서 거슬리게 만들더라도 과한 언어로 대꾸하기보다는 표정으로 대응하라고 조언했으나, 심기가 거슬린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곧바로 반박에 나섰다.
그는 “사람들은 내 집회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정치 역사상 가장 큰 집회, 가장 놀라운 집회를 한다”고 주장했다. 해리스 부통령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해리스 부통령의 보좌관은 CNN에 “그는 모든 면에서 미끼를 물고 있다”고 표현했고, 한 민주당 의원도 “맙소사. 해리스가 트럼프를 성가시게 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끼를 물었다”고 전했다.
이후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폭주’는 계속됐다. 그는 “이민자들이 반려견을 잡아먹는다고 한다”는 얘기를 길게 늘어놨고, 사회자가 ‘사실이 아니다’라고 바로 잡았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래서 트럼프와 같이 일했던 공화당 인사들이 나를 지지한 것”이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인플레이션을 두고 해리스 부통령을 공격했다. 지난 3년 동안 식료품 가격이 급등했다는 것. 그러나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 이는 해리스 부통령에 대한 공격보다는 바이든 대통령을 향한 공격에 가깝기 때문이다.
해리스 부통령은 이 공격을 “당신은 조 바이든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경쟁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민주당 전략가이자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의 전 고문인 케이틀린 레가키는 뉴욕타임스(NYT)에 “해리스는 반복적으로 그가 주제에서 벗어나거나 가장 인기 없는 입장을 두 배로 강조하도록 유도했다”고 평가했다.
공화당 경선 주자였던 크리스 크리스티 전 뉴저지 주지사는 “해리스는 매우 잘 준비했고, 함정을 놨다”며 “말해야 할 것에 대해 말하면서도 토끼굴에 빠진 토끼를 쫓아다녔다”고 말했다.
다만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공격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며 부통령이 아닌 대통령 후보로서 자신을 홍보할 기회는 부족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폴리티코는 “해리스는 90분 동안 트럼프를 방어적으로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낯선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정책 비전을 제시할 시간이 줄었다는 대가를 치렀다”고 전했다.